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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 호러 하우스

선택적 백수

1973년 4월13일 금요일 우스터의 정원 난간에 세 어린이의 시신이
찔려 죽은 채로 발견 됐습니다.
13일의 금요일 밤의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이는 아이들 부모의
친구 데이비드 맥그리비 였습니다.

1951년 사우스 포트에서 태어난 맥그리비는 여섯 형제중 둘째
였습니다.
가족들은  군인인 아버지로 인해 자주 이사를 하였습니다.
군사 기지에서 살던 그는 1년 동안 영국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에 독일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 가족들은 어느 곳에서 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숲속으로 피크닉을 가거나 자전거를 타기도 했으며 겨울엔 스키를
즐겼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듯 보였습니다.

 1967년 15세의 맥그리비는 학교를 그만두고 왕립 해군에 입대
하고 아버지의 뒤를 따릅니다.

60년대 그는 해군 기지에 주둔하게 되는데 동료들에 말에 따르면
맥그리비는 꽤 오만하며 건방진 태도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이 결국 군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됐고 많은 징계를
받았습니다.
군에서 골칫덩이가된 맥그리비는
 어느날  방화혐의를 받고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해군으로 부터 퇴출되게 됩니다.

퇴출되기전에 맥그리비는  90일간의 구금형을 선고 받고 또 정신과 검사를 같이
진행 했습니다.
그를 검사한 의사는 그의 결과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오늘 날까지도
일반인이 확인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맥그리비는 이후 술에 빠져 살기 시작하다 1971년 마리아라는 여성을 알게 됐습니다.
이들은 1월에서 4월까지 4개월 편지를 주고 받았고 4월에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맥그리비는 마리아를 만나고 일주일만에  그녀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둘은 약혼을 했고 둘 사이의 애정은 깊어져 가고 있었지만
맥그리비의 엄마는 둘의 사이를 반대 합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마리아는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척추로 인해 그녀는 불편함을 겪었습니다.
또 그것이 치료가 되지 않는 다면 언젠가 그녀의 몸이 마비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맥그리비는 엄마의 말은 신경쓰지 않았으며 자신의 애정을
지켜나갔습니다 .

그의 해군 최종 경력이 8월에 끝나게 되면서 짐을 싸들고
부모님 집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이후 맥그리비는 주로 주방이나 일용직을 전전하며 일하게 됐지만
그곳에서도 해고 당합니다.
그의 태도와 술에 대한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목표도 없고 황폐해져 가던 그는
그녀를 목표로 잡게 됩니다.

맥그리비는 결혼 계획을 짭니다.

그는 직업도 없고 수중에 돈도 없었지만 크고 호화로운 결혼식을
크리스마스 날에 올릴 꿈을 꿉니다.

하지만 이런 허황 된 꿈은 메리에게 현실적이지 못했고 결국
그녀는 그를 떠나게 됐습니다.

스무살의 그는 부모님과 함께 살며 직업도 없었고 돈도 없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집안 일 역시 돕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부모님에게 의지해 살던 그가 친구인 클라이브 랄프와
함께 살게 됩니다.
집에는 클라이브의 아내 엘시와 그들에 3명의 자녀들과 함께
살고있었습니다.
아마도 맥그리비는 부모님과의 논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구와
함께 살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이 살게 된곳은 막다른 골목에 있었고 10채의 집이 붙어
있었습니다.

잠깐 클라이브 부부의 이야기를 하자면 둘은 엘시가 17살때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 아이 폴을 낳고 1971년
두번째 아이를 낳습니다.

클라이브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그리고 맥그리비와
살기전 1972년 9월 세번째 아이를 낳게 됩니다.

이렇게 맥그리비와 클라이브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클라이브의
가족들은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작은 집에서 여섯명이 함께사는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습니다.

클라이브와 엘시를 위해 맥그리비는 종종 아이를 돌보아 줬습니다.
믿음직스럽고 그 누구보다 든든한 베이비시터가 부부에게 생긴
것입니다.
오만한 성격이 항상 문제가 됐었지만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었었는지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맥그리비는 집세로 6파운드를 지불했고 가끔 가족들과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그는 평상시에는 얌전하고 그다지 기억에 남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술에 취한 그는 그의 부모들을 화나게 합니다.
.근처에 사는 부모님은 항상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1973년 4월13일 금요일
엘시는 저녁식사를 한 뒤 아이들에게 굿나잇 키스를 하고
일을 하러 나갑니다.
밤 11시가 안된 시간 클라이브는 아내를 데리러 가기위해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던 맥그리비를
집에 데려와 아이들을 부탁합니다.
그렇게 클라이브는
맥그리비에게 4살 폴 두살 던 9개월 된 막내 사만다를
맡기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것은 클라이브 부부의 최악의 선택이 됐습니다.
부부가 집에 도착했을때 자신들의 집 앞에 서 있는 경찰
들을 발견 합니다.

그리고 경찰에게서 끔찍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됐습니다.


 술에 취한 맥그리비는 아마도 아이들을
돌보는 것에 기분이 좋지 못 했을 것입니다.

술에취하지 않았을땐 나름 친절하던 맥그리비는
이미 술을 마신 상태였고 어쩌면 잘 놀고있는 자신을
애들을 돌보라며 부른것에 대해 화가나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와중에 막내 사만다가 배가 고팠는지 칭얼대기 시작했고
맥그리비는 아이를 달래 주는 대신 끔찍한 선택을 했습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막내 사만다는 두개골이 골절되어 사망했고
둘째 던은 목이 그어졌으며 첫째 폴은 목졸려 숨진 것으로
조사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인으로만 끝낸 것이 아니었으며 더 끔찍하고
잔인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시신들을 챙겨 밖으로 나와 이웃집 철사로 이어진 울타리에
 장식했습니다.
그다음 맥그리비는 집을 떠났고 새벽 길거리를 걷고 있던 그를
체포 합니다.

체포된 맥그리비는 처음에 살인을 부인 했지만 나중에 자신이
했다고 인정 했습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20년 이후 가석방 신청 자격이 주어지며
종신형을 선고 받게 됩니다.

감옥에 들어간 그는 다른 죄수들의 폭행 피해자가 됐습니다.

맥그리비는 2013년 가석방 위원회가 공개 감옥으로 그를
옮기는 것을 거부하자 법적 조취를 취합니다.
특별 판결에서 판사는 그의 변호사의 말대로 맥그리비의
신원을 비밀로 해야한다는 것에 동의 했습니다.

맥그리비의 변호사는 수감자들이 맥그리비가 저지른  범행
사실을 알게 되면 그를 공격할 것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한 언론에 따르면 그는 감옥에서 요리 시설을
이용 한다던가 도서관에 가서 원하는 책을 얼마든지 보며 지내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고 합니다.



맥그리비의 살인은 정말 단순히 술에 취해 미쳐서 일어난 사건
이었을까요?

어린 시절부터 거만하고 오만했던 그가 자신은 가지지 못한
삶에 대해 클라이브를 질투해 벌인 살인은 아니었을까요 ?

어째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요...
 스트레스가 많아 그게 폭발했다고 해도 어떻게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수가있을까요...
맥그리비는 교도소안에서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최근 상황을 조사해본바
45년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가석방 위원회에 따르면 그 기간동안
상당히 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변한 그를 어떻게 했을까요?
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됐습니다.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절망했고 법이 정의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의 상처를 감히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요..


절친의 믿음을 배신한 무려 세명을 살해했지만 자유의 몸이 된 
13일의 금요일을 현실로 끄집어낸 데이비드
맥그리비 사건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