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셰퍼드는 1923년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에서 태어 났습니다.
그는 하노버 대학과 웨스턴 리저브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다가 로스
앤젤레스로 이주하여 졸업을 합니다.
1945년 샘 셰퍼드는 고등학교때부터 연인이던 마릴린과 결혼을 했고
이후에 오하이오로 돌아 왔습니다.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7월 4일 전까지 부부는 클리블랜드의 교외에
살며 행복한 시간들을 보냅니다.
1954년 7월 3일 이웃들이 셰퍼드의 집을 방문했고
그는 TV를 보며 거실 쇼파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이웃들은 자정쯤 집을 떠납니다.
7월 4일 샘 셰퍼드는 친구인 스펜서 시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그가) 마릴린을
죽인 것 같다고 말 합니다.
스펜서와 그의 아내가 셰퍼드의 집에 도착했을때 샘은 상의를 벗고
있었고 바지의 한 쪽 무릎 부분이 피에 젖어 있는 상태 였습니다.
셰퍼드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아내가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위급한 상황임을 직감했고 서둘러 윗층으로 뛰어 올라 갔습니다.
그곳에서 아내 마릴린의 위에 올라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고 그와 격투를
벌였지만 침입자의 손에 의식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깨어났을땐 마릴린은 죽은채 였습니다.
셰퍼드는 아직 어린 아들이 기억났고 옆 방으로 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뒤
바로 아래로 내려와 침입자를 다시 마주하게 되지만 침입자는 도망칩니다.
셰퍼드는 침입자를 잡기위해 그의 뒤를 쫓았고 다시 격투가 벌어졌지만
이번 역시 침입자의 손에의해 의식을 잃게 됐습니다.
셰퍼드가 깨어났을땐 상의가 벗겨져 있었고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침입자의 모습을 머리카락이 무성한 부쉬 머리라고 말은했지만
마딱드린 것 치고는 정확하게 묘사하기 힘들어 했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조차 알지못했고 침입자를 나쁜 사람이라고 묘사하며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이유에대해 두 번의 기절때문이라고 말 합니다.
경찰은 그의 주장을 의심했습니다.
사실 누가봐도 무언가 엉성한 증언이긴 합니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일에 더 호기심이 생기니 언론은 당연히 그에대한
기사를 실어 날랐습니다.
당시 7월 30일의 신문 한 면에는 "왜 셰퍼드는 감옥에 있지 않나 ?"
라는 글 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셰퍼드는 아내의 살인 혐의로 체포 되었고 1954년 10월 18일 재판이
시작 됐습니다.
셰퍼드의 사건은 린드버그 납치 사건 만큼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언론에 보도되는 사건이 됩니다.
언론은 재판중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셰퍼드를 유죄라고 확정하듯
기사를 실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기사를 읽었습니다.
1954년 12월 21일 결국 쉐퍼드는 아내 살인으로 2급 살인죄를 받아
유죄를 판결 받았으며 종신형을 선고 받게 됩니다.
재판이 끝나고 1955년 1월 7일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그의
어머니는 자살을 택했습니다.
그로부터 11일 후 충격 받은 탓인지 스트레스인지 그의 아버지 역시
위궤양과 위암으로 사망 합니다.
가족의 붕괴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63년에는 그의 장인 .. 마릴린의 아버지가 자살을 택합니다.
셰퍼드는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의 변호인과 함께 판결을 뒤집기 위해
힘 썼고 그의 항고가 대법원으로 넘어 갔습니다.
1966년 6월 6일 배심원의 8 : 1의 투표로 유죄판결이 뒤집어 졌고
언론에 의해 대법원은 비웃음을 당하게 됩니다.
셰퍼드의 재판에 관해 판사가 통제하지 못했다고 말하며 선동하는
기사들을 써댔습니다.
무죄를 받고 자유를 다시 찾은 셰퍼드는 더 투나잇 쇼에 게스트로 출연
하기도 했으며 책도 냅니다.
그리고 레슬링에 잠깐동안 빠져 킬러 샘 셰퍼드라는 이름으로 레슬링
경기까지 출전 했습니다.
그는 그 짧은 기간동안 기술까지 발명했고 그 기술은 대중화 됩니다.
그는 석방된 뒤로...
아마 여러가지 자신의 심적인 문제들이겠죠 ?
고통을 완화하고 자신을 달래기 위해 술에 의존하기 시작 했습니다.
술은 무서운 속도로 그를 잡아 먹었습니다.
1970년 4월 6일 그는 결국 간부전으로 사망하는데 나중에 그가 베르니케
뇌병증에 걸린 것 역시 확인 됩니다.
그가 사망하고 30년이 지나 어리던 아들은 성인이 되어 자신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투옥 됐다며 민사 소송을 제기 했습니다.
샘 셰퍼드의 무덤을 열어 그의 DNA 샘플과 현장에서 발견된 DNA를
비교하며 그가 살인 현장에서 있었던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냅니다.
그러며 또다른 범인이라고 판단되는 셰퍼드의 청소부로 일했던 잡역부
리차드 에벌링이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 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집 안에서 샘 셰퍼드와 아내 마릴린의 것이
아닌 제 3자의 혈흔을 발견 했으며 DNA 역시 샘 셰퍼드의 것이 아니기에
그가 무죄라고 말 했습니다.
주장이 있을 당시 리차드 에벌링은 84년에 저지른 살인죄로 종신형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의심 받을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
그를 가까이 했던 여성들이 알 수 없게 사망을 했다 것 입니다.
또 1959년에 그는 베이 마을 근처 지역에서 강도 사건에 대한 혐의를
받고 있었고 그로인해 경찰이 그를 수색한 결과 그에게서 마릴린의
반지가 발견 됐습니다.
그러나 리차드 에벌링은 살인이 있고 몇 년 후에 샘 셰퍼드의 형의
집에서 그 반지를 훔쳤다고 주장 합니다.
그러며 자신은 그 살인 사건과 관련이 없기에 무죄라고 주장 했습니다
1966년 샘 셰퍼드의 재심이 있을때 그는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통과했기에
용의자에서 벗어 납니다.
하지만 나중에 전문가들은 그 테스트의 결과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밖에도 샘 쉐퍼드의 입장에서 불리한 일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가 다시 항소를 하려고 했을때 법원이나 언론이 그것을 막으려 했다는
주장이 있었으며 2심 재판때 대법원의 한 판사는 그 사건을 다시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재판에서 검사들은 칼이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셰퍼드 박사의 바지
얼룩은 아내를 살해한 흉기인 칼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 했습니다.
또 리차드 에벌링의 DNA가 마릴린에게서 발견 됐고 그녀의 시신은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암시하였지만 검사는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가지를 증거로 들며 주장했던 샘 셰퍼드의 아들 길버트의 민사 소송은
결국 실패로 돌아 갔습니다.
한 검사는 샘 셰퍼드가 아내를 살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사건 당시 더 자세하고 세밀한 조사가 있었어야 하며 칼에서 나온
피의 흔적이라고 주장 했던 기소 이유는 오류가 있다고 대답 합니다.
샘 셰퍼드가 어찌 됐든 무죄로 풀려났고 자유를 얻었지만 여전히 그가
살인범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뒤늦게 그가 무죄인 것이 밝혀 졌지만 그의 억울함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는 풀려난 후 술과 마약에 손을 댓고 풀려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결국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왜 어째서 리차드 에벌링은 더 상세히 조사가되지 않았던 것일까요.
여전히 그날의 미스테리를 풀지 못하고 남겨져 있는 1950년대
OJ 심슨 사건이라고 불리우는 샘 쉐퍼드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베르니케 뇌병증의 증상 이라고 합니다. 혼란,안구진탕,안구 운동 마비,손발의 마비,동공 부등 ,운동 실조증 ,동공 반사 부진 등 그 혼란이라는게 정신 착란 이런게 아닐까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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