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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 호러 하우스

엄마와 아들의 비밀 10대 미인으로 칭송 받던 여성 바바라




바바라 데일리 베이클랜드


바바라는는 베이클라이트 플라스틱을 발명한 리오 베이클랜드의 

손자랑 결혼을 했던 전 부인 입니다.


그녀는 보스톤에서 태어났습니다.

1932년 바바라가 10살이 됐을때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차고에서 차의 시동을 키고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자살을합니다.

바바라와 그녀의 엄마는 아버지의 사망 보험금을 지불 받고 

뉴욕으로 이사했습니다. 


바바라는 사교계에 데뷔하고 굉장한 주목을 받았으며 보그와

하퍼스 바자 의 페이지에서 모델로 활약 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사교계와 대중들에게  완벽한 이미지로 보여지게 되었지만 사실 

바바라는 아주 심각한 정신 불안정증세로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바바라는 뉴욕에서 10대 가장 아름다운 소녀로 불리웠으며 사회적 

지위와 아름 다운 덕분으로 여러 부유한 이들의 모임에 초대

받았고 그곳에서  리오의 손자 브룩스 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브룩스 역시 일 보다는 즐기고 사는 것에 더 중점을 

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바라와 잘 맞았고 둘은 잘 어울리는 한쌍이 

됩니다. 


이후 바바라와 브룩스는 아이를 갖게 됐고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게 됐습니다. 

결혼 후 에도 이들의 사치스러운 삶은 멈추지 않았고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고급 아파트에

자리를 잡고 디너 파티를 열며 유명 인사들을 초대 합니다.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바쁜 삶에 그녀는 굉장히 

바빠 보였지만 정신적인 문제는 점점 심각해져 갑니다. 

불안정한 성격 심각한 발작 심각한 우울증 등으로 술에 

의존했고 부부는 각각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1946년 8월에 아들 안토니를 낳았고 아이가 8세가 된 

1954년 여름 런던 파리 체르마트 등 여러 곳에 주택과 

빌라를 임대하며 손님들을 초대하고 호사스러운 생활로 

손님들을 즐겁게 합니다. 

그렇게 호사스러운 생활을 이어가던 중 

1960년 남편 브룩스가 15세의 영국 외교관 딸을 만나게 됐고

바바라에게 이혼을 요구 하게 됐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바바라는 

자살 시도를 했으며 브룩스는 이혼 이야기를 거두었습니다.


1967년 가족들은 스위스와 스페인에서 머물렀고 안토니는

양성애자인 호주인 제이크 쿠퍼를 만나게 됩니다. 


쿠퍼는 안토니를 다양한 환각제의 세계로 초대 했고 더 

많은 종류의 환각제를 얻기 위해 모로코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바바라는 친구에게 이 사실을 듣게 됐고 그녀는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그를 찾아 갑니다. 


하지만 안토니와 돌아오 던 중 이들은

프랑스 국경에서 안토니가 여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알았고 안토니와 바바라 둘 다 체포 되어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스페인에 돌아온 바바라는 아들과 쿠퍼의 관계를 깨기 위해 

스페인 여성 실비를 소개해 주며 두 사람의 관계에 발전이 

있길 빌었지만 실비는 안토니가 아닌 바바라의 남편 

브룩스와 눈이 맞았고 둘은 바람을 피우게 됩니다. 


1968년 이 둘의 관계를 알게 되고 바바라는 자살 시도를 

했지만 이번에 브룩스는 강경 했습니다. 

그는 이혼을 진행했고 실비와 결혼 한 뒤 아이를 낳았고 

다시 얼마 뒤 실비와 이혼 하고 브룩스는 새로운 여성과 

결혼을 합니다. 


바바라는 이혼 후 자살 시도와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을때 

친구의 도움으로 견뎌 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안토니가 자신과 런던에서 지낼 것이라고 남편

브룩스에게 말합니다. 

브룩스는 그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바바라와 아들은 공동 의존 관계를 유지하게 됐고 

바바라는 아직 어린 안토니에게 자신의 혼인과 정신적 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합니다. 


당시에 동성애는 정신병적인 문제라고 치부 되었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에 

바바라는 아들의 동성애를 고치려고 매춘 여성들을 

고용해 아들 안토니와 관계를 강요 합니다. 

많은 실패 후 그녀는 아들의 문제를 자신이 처리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여성으로써 아들 안토니와 관계를 맺고 그를

고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강요로 이어 진 것으로 확인되며 안토니는 

편집증 성향의 정신 분열 징후를 보이게 됐고 그런 

아들의 정신적 치료를 아버지는 거부 했습니다. 


안토니는 종종 위험하고 엉뚱한 행동을 하며 가족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대체로 그는 나이프와 관련된 문제를

일으킵니다. 



1972년 11월  런던 시간이 흐르고 흘러

50세가 된 바바라는  펜트 하우스

인근에 거주하던 러시아 공주 미시와 점심을 먹기위해

만났습니다.


이들은 전날 바바라가 개최 했던 칵테일 파티에 대해 수다를

떨며 스페인 레드 와인과 함께 베이컨,콩, 샐러드 필레

미뇽을 먹었습니다. 


오후 3시 30분 점심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 나며 바바라는

아들 안토니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미시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오후 7시 미시는 전화를 받습니다. 

그것은 바바라와 만난 시간과 헤어진 시간을 묻는 경찰의 전화 

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 

 "고인을 얼마나 잘 알고 있었습니까 "라는 

질문에 그녀는 너무 놀라 아들에게 전화를 건내 주고 말았

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유명인들의 지인 이며 런던의 가장

비싼 지역 중의 한 곳에서 살해 당한 바바라의 사건은 미국과

런던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사건이 됩니다. 

그리고 살인범 역시 한 몫 했습니다 그녀의 살인범은 바로 

아들 안토니 였습니다. 


이것은 사실 갑작스레 일어 난 일이 아닙니다. 

바바라의 가까운 지인들과 안토니의 정신과 의사는 그녀에게 

경고를 해왔다고 합니다. 


안토니가 그녀를 죽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바바라는 그것을 웃고 넘어갔으며 

사건 당일 날 점심 식사때도 그녀는 아들 칭찬을 늘어 

놨었다고 합니다. 


안토니는 어머니 살인에대해 자백을 하며 

나는 내 마음이 약간 엉뚱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난 늘 어머니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나는 마치 어머니가 내 마음을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곤

했습니다. 

라고 말하며 기억을 더듬는것에 약간의 혼란이 있는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바바라를 따라 들어가 

부엌 칼을 집어 들고 그녀를 찌른 것은 기억 합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구급차를 불렀습니다.

안토니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몇 시간이 걸렸고 

그것은 끔찍 했으며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을때 

바바라는 안토니를 보거나 말을 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그녀는 

죽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구급대원들은 그녀를 발견했고 경찰에 신고 합니다. 

당시 안토니는 중국음식을 주문 배달 하며 침실에 있었습니다. 

그는 마치 현재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안토니는 체포 되어 브릭 스톤 교도소에 수감 됐고 그를 

방문한 친구에게 어머니는 어때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나중에서야 안토니는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1973년 6월 안토니는 존 모티머에 의해 옹호 되며 형벌이 

감소되어 과실 치사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브로드무어로 

보내 졌습니다. 


그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과 도움으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 올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은 안토니의 폭력성이 어머니를 살해하며 없어졌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안토니의 아버지는 그를 믿지 않았고 그가 정신병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그를 거부 합니다. 

안토니가 브룩스에게 편지를 보내 실비를 살해 할 것이라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런 여러가지 일들로 안토니가 미국으로 돌아왔을때 아버지

브룩스는 그를 받아들이길 거부 합니다. 


안토니에겐 선택할 권리가 없었고 결국 그를 용서한 외할머니의

집에 함께 머물게 됐습니다. 


7월27일 아침 안토니가 

할머니 니니 데일리와 함께 지내기 시작한지 6일째 되던 날

니니의 간호사 레나는 안토니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며 벨을 

누릅니다. 


레나도 열쇠가 있었지만 안토니가 자신이 이곳에 머무를 동안   레나가 가지고 있는 열쇠를 빌려 달라고 했기때문에 그녀는 안토니가 문을 열어 줄때 까지 문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안토니가 문을 열어주는것은 오래 걸립니다. 

드디어 그가 문을 열어 주었을때 그는 레나 에게 구급차를

부르라며 소리쳤고 자신이 할머니를 찔렀다고 말 했습니다.


레나는 근처의 공중전화기로 달려가 경찰에 신고 합니다. 

경찰이 집에 도착 했을때 니니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안토니는 경찰들을 향해 달려 나왔습니다.


안토니는 경찰에게

그녀는 죽지 않을꺼야 그리고 그녀는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요 !! 나는 그녀를 이해 할 수 없어요 라며 소리 칩니다. 

 

경찰은  잠옷을 입고 자신의 침실에 누워 있는 니니를 발견

했으며 그녀는 칼에 8번 찔리고 골절된 쇄골 뼈와 갈비 뼈 등 

여러군데의 부상을 입은 상태 였습니다.


안토니는 경찰서로 연행 됩니다. 

경찰에게 그는 할머니와 있을때 그녀와 관계를 맺길 

원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폭력의 어느 정도의 요소 였지만 촉발의 원인은 아닙니다.

경찰은 안토니가 영국에 전화를 걸려고 하는것을

니니가 막은 것이 촉발의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니니는 부상에서 살아 남았고 안토니는 살인 미수 혐의로 

뉴욕의 교도소 라이커스 섬으로 보내 집니다. 


수감중에 그는 신탁 기금 2만 파운드를  자신을 보호 하는

비용 일부는 관계를 맺기 위해 사용 했습니다. 


1981년 3월20일 그는 재판에 사용할 영국에서의 의료 기록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재판이 한달 연기 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그때까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 있길 원했지만 

그것은 거부 되었습니다. 


그 날 오후 3시 30분 안토니는 자신의 침대에서 죽은 채로 

발견 됩니다. 

안토니의 죽음의 원인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가 자살한 것인지 죽임을 당한 것인지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부러워했던 부유한 상류층의 가족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 했습니다.

 

지치고 메마른 마음은 자신의 정신 건강에 영향을 주었고 

마치 되물림 처럼 아들 역시 정신 문제를 갖게 됐으며 

그들 스스로를 좀 먹게 된 듯 합니다. 


너무나 기구한 어머니와 아들  안토니 베이클랜드 

사건 이었습니다.